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프 헤어베어거 (문단 편집)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 종전 이후 근 10년 만에 처음으로 진출한 국제 대회인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스위스 월드컵]]. 서독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지역예선#s-2.1|지역 예선]]에서 [[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노르웨이]], [[자를란트 축구 국가대표팀|자를란트]]와 한 조가 되었고 4전 3승 1무로 손쉽게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1953년 11월 21일 [[함부르크]]에서 서독이 노르웨이를 상대로 한 5대1 승리만이 팬들과 비평가들을 만족시켰고 1954년 3월 28일 자르브뤼켄에서 [[헬무트 쇤]]이 감독하던 자를란트를 상대로 3대1 승리를 거둬 스위스행 티켓을 따냈음에도 불구하고 해설자들의 비판은 이어졌다.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이 1954년 5월 23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독일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한 수 아래로 취급되던 [[하노버 96]]을 상대로 1대5로 대패했는데 이것도 서독 대표팀과 헤르베르거에 악재로 작용했다. 당시 카이저슬라우테른엔 [[프리츠 발터]]를 필두로 헤르베르거와 함께 스위스에 가서 월드컵을 출전할 것으로 예상되는 서독 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이 5명이나 포함되었는데 이런 팀이 1대5로 패배하자 난리가 난것이었다. > 헤르베르거는 하노버에 천벌을 받은 카이저슬라우테른 출신의 몇몇 바보같은 노장들과 사랑에 빠졌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의 가톨릭 신앙때문일 것이다. >---- > 다스 슈피겔지 하지만 이때의 헤르베르거는 이런 악재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념에 따라 자신의 선택을 고수했고 패배한 선수들이 기량과 성격에서 월드컵 스쿼드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을 비평가들에게 보여주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헤르베르거는 만족감에 안주하기보다는 최근에 타격을 입은 명성을 재건하기 위해 좌절, 분노 및 성가심 등을 기폭제 삼아 의지를 불태우는 선수들을 곁에 두길 원했다. 독일 축구대회 결승전이 끝난 지 불과 사흘 뒤인 5월 26일부터 [[뮌헨]]의 그룬발트 스포츠학교에서 2주간의 월드컵 준비 과정이 시작됐다. 여기에서 헤르베르거는 정교한 훈련 계획을 통해 선수들의 레벨을 높이는 것에 주력했다. > 처음 며칠간 우리는 너무 힘들었고 항상 죽을 것같은 몸상태로 침대에 쓰러졌지만 일주일 후 우리는 많은 것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정이 끝날 무렵 우리는 가볍고 자유를 느꼈습니다. 몸이 최상의 성능을 발휘하도록 설정된 거죠. 이론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리의 상대팀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칠판과 영화 상영을 통해 친숙해졌습니다. 헤르베르거는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지적했습니다. 그가 그들을 미리 철저히 연구한 것은 괜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 > 프리츠 발터 헤르베르거와 서독 선수들의 철저한 준비가 알려지지 않아서였을까? 16개국 본선에서 독일의 선전을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첫번째 경기에서 서독은 [[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터키]]를 4대1로 눌렀지만 두번째 경기의 상대는 당대를 넘어 역대급 최강의 팀이었던 '매직 마자르'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 서독은 헝가리에 3대8이라는 떡실신에 가까운 스코어로 참패했다. 이 참패의 결과가 알려진 서독 국민들의 반응은 "[[제1차 세계 대전|전]][[제2차 세계 대전|쟁]]도 진 국가인데 축구를 이길 리가 있냐. [[우린 안 될 거야 아마]]"의 체념적 반응과 더 이상 나라 망신 시키지 말고 빨리 서독으로 돌아오라는 날선 반응이었다.[* 헤르베르거는 이 경기때문에 고국에서 비난 편지도 한가득받았는데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헤르베르거 씨. 지금 당장 밧줄로 목을 매어 죽되 밧줄은 재활용해야하니 돌려주시길". 2003년에 독일에서 개봉한 영화 베른의 기적에도 이 편지가 소개되었다.] 서독은 헝가리에 밀려 터키와의 조 2위 결정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했지만 터키에 7대2 대승을 거두고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8강 상대는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라이코 미티치]], [[스체판 보베크]] 등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의 공격진은 헝가리에 비견될 만큼 강력했기에 헤르베르거는 선수비 후역습 전술을 꺼내들었다. 그는 팀의 우수한 신체 조건과 선수들이 훈련된 방식으로 그가 준비한 빠른 역습 전술을 기꺼이 수행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전술이 맞아떨어져 서독은 유고슬라비아를 2대0으로 꺾고 4강에 진출했다. 이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한 쾌거였다. 서독의 4강 상대팀은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로 결정되었다. 오스트리아도 당시 유럽 최고급 하프백 [[에른스트 오크비르크]]가 버티는 강팀이었다. 헤르베르거는 시합 전까지 동기 부여, 전술 인식과 함께 산만함을 최대한 배제하고 휴식을 위한 좋은 음식과 편안한 숙박 환경을 만드는 것에 주력했다. 오스트리아 선수들의 자유롭고 기술적인 플레이 성향에 서독 선수들이 제대로 카운터를 먹이며 서독은 6대1로 오스트리아를 크게 이겼다. 이렇게 서독은 결승까지 승승장구해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결승 상대는 당시 누구나 예측했던 헝가리. 서독이 헝가리에 비해 상당한 꿀대진[* 그래서 헤르베르거가 이를 노리고 일부러 헝가리가 1등으로 올라가도록 조별 예선에서 고의로 졌다는 의혹도 지금까지 따라다닌다.]을 받고 결승에 올라온 반면 헝가리는 8강에서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전 대회]] 준우승팀이었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브라질과의 준준결승전은 [[베른의 전투|월드컵 역사에 남을 난투극]]이었고 경기가 끝나고 양팀의 패싸움까지 있었다.], 4강에서 우승팀이었던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와 연이어 대혈투를 벌이면서 힘을 상당히 뺀 채로 결승전에 올라왔다. 헝가리가 역대급 강팀이라도 서독은 기껏 결승까지 올라왔는데 [[기권|시합도 안 해보고 헝가리에 우승컵을 넘겨준 채 서독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헤르베르거는 선수들과 독일 축구팬들에게 축구가 존재하는 한 불멸의 어록을 남겼다. > '''공은 둥글고, 경기는 90분이나 진행된다.'''[br](Der Ball ist rund und ein Spiel dauert 90 Minuten.) 헤르베르거는 헝가리의 전력에 감탄하면서도 그들을 2년여간 분석하며 결승에서 서독이 노릴 수 있는 약점을 계속 찾았고 결론이 나왔다. 헝가리의 수비, 그리고 [[난도르 히데구티|히데그쿠티 난도르]]. 먼저 헤르베르거는 조별 예선에서 비록 8골을 허용하긴 했지만 서독도 3골을 넣었으니 그들의 수비진이 결코 무적이 아님을 선수들에게 계속 상기시켰다. 그리고 헝가리는 당시 센터 포워드 히데그쿠티를 [[폴스 나인]]처럼 사용하며 변칙적인 전술로 상대팀들을 제압해왔다. 이에 헤르베르거는 [[호르스트 에켈]]에게 히데그쿠티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가 주고받을 패스 줄기를 최대한 차단하도록 했다. 에이스 [[페렌츠 푸스카스|푸슈카시 페렌츠]]를 제어하는 역할은 [[베르너 리브리히]]에게 맡겼다. 또한 공격적인 하프백 [[요제프 보직|보지크 요제프]]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비우면 그 틈을 노리도록 지시했다. 그 임무는 [[한스 샤퍼]]에게 1순위로 부여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결승전. 하지만 헤르베르거의 준비와 기대에 어긋나게 전반 10분 만에 서독은 헝가리에 2골을 내줬고 서독 국민들과 해외 축구팬들은 조별 예선에서 벌어진 3대8 패배를 넘어 더 큰 스코어차로 패배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서독은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고 하프타임은 동점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후반전에 서독 선수들은 헝가리의 파상공세를 처절하게 버텨내다가 [[헬무트 란]]의 역전골로 '''기적과 같은 3-2 대역전승을 일궈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베른의 기적이다.[* 다만 훗날 서독 선수들이 하프타임에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했다는 정황이 밝혀졌으며, 비록 당시에는 합법이었다지만 당시 선수들도 당당히 메스암페타민인줄 알았다고 시인하지 않고 비타민인줄 알았다고 둘러댔을 정도로 결코 떳떳한 행위는 아니었다. 결국 이 비신사적인 행동은 현재에 와서도 과연 당시의 서독의 우승이 100% 정당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여지를 남겼다.] 헤르베르거는 후에 1954년 월드컵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스위스에 갔을 때 대부분 프로 선수였던 모든 국가의 참가자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 선수들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어떤 팀이나 선수도 우리보다 앞으로의 과제에 더 잘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히 서독 대표팀은 열광적인 환영 인파들속에서 [[금의환향]]했다. 서독 정부는 대표팀에 당시 가장 우아한 모델의 열차인 VT 08 디젤 복합 열차를 제공했고 빨간색 특별 열차는 긴 대형 문자로 장식되어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태웠다. 열차는 독일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더 많은 서독 국민들에게 드러냈고 각지에서 축하연과 시상이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